복합강으로 만든 명장의 칼, 오로지 칼에 대한 열정만으로 달려오다!
복합강으로 만든 명장의 칼, 오로지 칼에 대한 열정만으로 달려오다!
  • 남궁주 기자
  • 승인 2019.04.0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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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용부 명장
주용부 명장

 

모든 요리는 그 자체의 맛을 살렸을 때가 가장 훌륭한 요리다. 본래의 맛을 살리기 위해서는 재료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것보다 먼저 중요한 것은 요리 할 때 사용하는 도구다. 기본적으로 ‘칼’이다. 칼은 주부들의 벗이며 가장 여러모로 활용되는 도구인데 칼만 잘 사용해도 음식의 영양소 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 ‘칼’을 만드는 데에도 명장이 있다.

경기도 고양시 화전역 인근에 위치한 ‘용호공업사’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무른 쇠와 강한 쇠를 붙인 ‘복합강’으로 칼을 만들고 있다. 복합강으로 만든 칼은 예리하면서도 튼튼하고 잘 무뎌지지 않는다. 그래서 회칼처럼 신선한 재료를 다루는 칼은 복합강으로 만든다. 이러한 기술은 쇠를 다루는 우리 전통 단조(鍛造) 기법에서 나온 것이지만 오히려 일본에서 계승·발전했고 한국에서는 그 맥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주용부 명장이 단조기술을 되살려내며 만들어낸 회칼은 독일제나 일제에 비교했을 때 외관이나 실용성이 더욱 뛰어나면서도 가격은 훨씬 합리적이다.

주용부 명장이 대장장이의 길을 걷게 된 배경은 6·25전쟁과 함께 시작된다. 그의 운명이 전쟁과 함께 급변한 것이다. 그가 대장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6·25전쟁 때인 열서너 살 무렵이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무엇이든 만들기 좋아하는 소년은 아마 뛰어난 기계공학도가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청주에서 단란하게 보냈던 그의 어린 시절은 전쟁이 터지면서 끝이 났다. 전쟁 통에 아버지가 실종되고 장남인 그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전쟁이 한창인 때 졸지에 가장이 된 소년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선 ‘목수는 깎는 일을 주로 하니 돈을 깎아 먹어 못살게 되지만, 대장장이는 잘산다’라는 속설이 떠돌았다. 이러한 소문을 접한 주용부 명장은 대장장이의 길을 걷길 결심한다. 전쟁 때문에 대장장이가 된 명장은 새벽 3시면 대장간에 나가 소나 말에 박는 징이나 편자 등 간단한 것을 먼저 만든 다음 아침을 먹은 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비록 디딤대가 필요한 꼬마 대장장이였지만 남들은 3년 걸려야 배운다는 대장간 일을 그는 석 달 만에 배우는 재능을 발휘했다. 그 덕택에 ‘천재 났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그가 천재 소리까지 듣게 된 것은 남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아주 능률적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평생 발명에 몰두해 여러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그는 처음 대장간 일을 시작할 때부터 더 편리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생각해내는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주인 대장장이보다 일을 더 빨리, 많이 해내 인정을 받았지만, 그는 청주 대장간에 만족하지 않고 서울 대장간에서 일할 결심을 하게 된다.

휴전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그는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서대문 대장간을 찾아갔다. 이미 대장간 기술은 웬만큼 익혀 자신이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절당해 청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써보아도 그의 솜씨를 따라가지 못하니 결국 이 대장간에서는 그에게 다시 와서 일해 달라는 전보를 보냈다. 주용부 명장은 “그 대장간의 대장장이 홍순명 씨는 ‘배뱅잇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씨와 함께 소리를 배우다 외삼촌에게 대장간을 물려받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이 였습니다. 칼은 본래 만들 줄 알았지만, 그 분에게 칼 만드는 기술을 많이 배웠습니다. 전쟁 직후라 그런지 칼이 정말 잘 팔렸습니다. 당시 서대문구청이 아현동 부근에 있었는데, 구청 건너편에 어시장인 중앙시장이 있었으니 더욱 칼이 잘 나갔지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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